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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녀문(神女門)의 성지(聖地) (2)

 

 

정신 차려! 이봐, 정신 차려!”

찰싹! 찰싹!

심주은은 임청우를 나무위로 끌어올려 놓고 뺨을 연신 때리며 소리쳤다.

그러나 떨어지면서 큰 충격을 받은데다가 늪 속에 잠겨 오랫동안 숨을 쉬지 못한 임청우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를 않았다.

그저 미약하게나마 심장이 뛰고 있다는 사실만이 아직 그가 살아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심주은은 손가락으로 임청우의 입과 코와 귀를 판 후에 가슴을 눌렀다.

몇 번 누르자 임청우의 입과 코로 진흙이 쿨럭쿨럭 흘러나왔다.

그러나 임청우는 여전히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

힘겹게 뛰고 있던 맥박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심주은은 죽은 듯이 누워있는 임청우를 착잡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임청우와는 만난 지 채 하루도 안된, 생면부지나 다름없는 사이다.

하지만 충동적이긴 해도 혼례를 올렸으니 부부라고 할 수 있다.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

이윽고 결심을 한 심주은은 임청우의 몸 위로 허리를 굽혔다.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심주은은 임청우의 코를 입으로 물고 세게 빨아 당겼다.

그러자 임청우의 콧속에 들어차있던 진흙이 그녀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

입안에 든 진흙을 뱉어내고 다시 임청우의 콧속에 든 진흙을 빨아내기를 몇 번 반복하자 더 이상 나오는 것이 없었다.

그것을 확인한 심주은은 임청우의 콧속으로 숨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자신이 임청우의 코를 물고 있긴 하지만 입맞춤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그 사실에 심주은의 심장은 터질 듯 두근거렸다.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외간 사내와 살갗도 닿아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코를 물고 숨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기가 막히기도 하지만 이런 게 인연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몇 차례를 반복하자 차갑게 식어가던 임청우의 몸에 따스한 온기가 돌아오는 것같았다.

콧속으로 숨을 불어넣고 가슴을 누르길 얼마 후 푸! 소리와 함께 임청우가 숨을 쉬기 시작했다.

임청우는 살아났지만 녹초가 되어버린 심주은은 진흙투성이의 몸으로 임청우에게 기댄 채 잠이 들고 말았다.

 

***

 

임청우는 가만히 눈을 떴다.

방문이 없는 방 속에 누워있는 듯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하늘은 뿌옇게 보이기는 했지만 달도 없고 별조차 보이지 않는다.

(내가 죽은 것인가? 여기는 지옥인가 아니면 극락인가?)

임청우는 늪으로 떨어지기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황의소녀 심주은을 생각하며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하고 중얼거렸다.

그녀의 당돌한 행동을 생각해볼 때 자기보다 좋은 곳으로 갔을 것같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임청우는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뭔가가 자기의 가슴에 기대고 있었다는 것을 상기해냈다.

따뜻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심주은이 자신의 가슴에 기대어 있었다.

온몸은 진흙투성이지만 그래도 얼굴의 진흙은 깨끗이 닦아낸 모습이었다.

임청우는 한쪽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척포를 발견하고서야 자기가 죽은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이 계집애가 날 살렸겠구나.)

전후의 상황을 파악한 임청우는 감격하여 심주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가슴이 심하게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붉은 입술 주변의 진흙이 떨어져 나가며 드러난 새하얀 볼...

새근새근 쉬는 듯 마는 듯 부드러운 숨결...

임청우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직여 심주은의 입술로 가져갔다.

호흡이 가빠오고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작 심주은의 입술을 만져보려고 하니 자기의 손이 너무 더럽게 느껴졌다.

도저히 그런 손으로는 그녀의 아름다운 입술을 만질 수가 없었다.

손가락으로 만지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얼굴을 심주은의 얼굴 앞으로 살며시 가져갔다.

심주은의 숨결이 볼을 스치면서 달콤하게 느껴졌다.

(... 안돼!)

심주은의 숨결이 뚜렷하게 느껴지자 임청우는 오히려 화들짝 놀랐다.

(임청우야! 임청우야! 네가 색마가 되려느냐?)

자신의 망령된 행위를 자책하며 임청우는 정좌를 하고 눈을 꼭 감았다.

하지만 분명 자기의 마음과 몸임에도 어떻게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자꾸만 심주은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르고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이해하지 못할 욕망이 들끓어 올랐다.

임청우는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속으로 생각했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생사는 인간의 중대사이지만 그 생사도 성인(聖人) 왕태(王駘)를 변하게 하지는 못하며, 또 비록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꺼지는 일이 있더라도 그를 파멸의 동반자로 만드는 잃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마음이 풍랑을 만났을 때는 옛 성현의 말씀을 길잡이로 삼아야만 한다.

(왕태라는 분은 표면의 인상을 초월한 진실의 이치를 밝게 알아 사물의 변화에 따라 마음이 움직이는 일도 없었다고 했다. 모든 사물의 변화를 천명에 따른 것이라 여기고 변화의 근본에 있는 부동의 도에 몸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같은 것이 가능하다고 하셨는데...)

 

장자(莊子) 내편(內篇) 중 덕충부(德充符)에는 여러 명의 불구자가 등장하는데 임청우가 생각하고 있는 왕태라는 사람도 발꿈치가 잘리는 형벌을 받은 사람이다.

그 당시에는 큰 죄를 지은 사람은 발꿈치를 잘라서 걸을 수 없게 하는 월()이란 형벌이 있었다.

왕태라는 인물도 월형을 받은 죄인이었지만 따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공자와 함께 노나라를 양분할 정도였다.

왕태는 서있을 때도 특별한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니고, 앉아 있을 때도 특별한 논의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텅 빈 머리로 왕태를 찾아갔던 사람이라도 충실한 마음을 갖고 돌아오곤 했다.

이러한 사실을 이상하게 여긴 공자의 제자 상계(常季)가 왕태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그 사람은 성인이다. 나도 한 번 뵙고 싶다 생각하면서도 그만 기회를 놓치고 그대로 있는 것이다. 나라고 해도 스승으로 공경하고 싶을 정도이니 하물며 나보다 못한 사람이 그를 따르는 것은 당연할 테지.

단지 노나라뿐만이 아니다. 나는 천하의 사람들을 이끌고서 함께 그의 제자가 되고 싶을 정도다.>

 

또 말하기를,

 

<사물을 차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같은 몸속에 있는 간과 쓸개의 사이라도 초나라와 월나라만큼의 거리가 있다.

하지만 모든 걸 같다고 하는 입장에서 보면 만물은 곧 하나이다.

이와 같이 만물제동(萬物諸同)의 입장에 있는 자는 눈귀의 듣고 보는 쾌락에도 마음이 이끌리는 일 없이 자기의 마음을 그 덕에 융합하여 하나가 되는 경지, 모두가 하나인 세계에서 놀게 하는 것이다.

왕태와 같은 인물이 만물을 볼 경우에는 그 동일한 본질만을 보고 개개의 사물이 상실되어가는 현상에 얽매이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발이 잘린 것쯤은 마치 흙덩이를 털어 버리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이다.>

 

(미추(美醜)를 구분한다는 입장에 선다는 것은 덕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뜻한다.)

옛 성현의 말씀을 떠올린 임청우는 자신의 부족함을 탓했다.

(만물제동이라는 진리를 잊지 않는다면 마음이 흔들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억지로 하려고 할 것은 아니지만 만물을 볼 경우에 동일한 본질만을 보고 그것의 세상에 융화하려는 점을 파악함으로써 만물제동의 이치에 이르도록 노력해야겠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나자 속이 후련해졌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눈을 뜨고 심주은을 보니 이젠 그녀가 아름답게 보이기는 하지만 다른 마음이 일지는 않았다.

임청우는 만물제동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기로 굳게 결심하면서 가만히 앉아 심주은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잠시 모습을 감추었던 척포가 돌아와 그의 품속에 있는 몽선도 속으로 찾아들어갔다.

한데 피로에 지친 심주은이 깨어나길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던 임청우는 계곡을 솥발처럼 둘러싸고 있는 세 개의 봉우리를 볼 수 있었다.

어둠 속이라 비록 희미하게 보였지만 마치 가지를 옆으로 벌리고 우뚝 서있는 전나무처럼 보이는 봉우리가 틀림없었다.

세 개의 봉우리는 그 배치의 절묘함으로 인해서 번갈아가면서 계곡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계곡에는 하늘이 열려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낮에도 햇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나무모양으로 보이는 봉우리의 그림자 두개가 합해지면 하늘마저 잘 보이지 않았다.

임청우는 그 신기한 자연의 조화를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바로 여기였구나.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엉뚱한 곳만 찾았으니...”

감격한 듯한 심주은의 음성이 들렸다.

심주은은 깨어나자마자 임청우의 시선을 쫓다가 나무모양의 산봉우리를 발견하고 이곳이 바로 자기가 찾으려던 그 장소라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세 개의 나무가 하늘을 가둔 곳!

바로 이곳이었던 것이다.

 

***

 

임청우와 심주은은 진창에 빠진 생쥐같은 몰골로 암벽 앞에 섰다.

암벽에는 관음보살을 연상시키는 절세가인이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그림이 음각되어 있었다.

심주은은 버드나무 가지가 가리키는 곳에 있는 바위를 옆으로 밀쳤다.

그러자 텅! 하는 소리와 함께 바위가 열리며 원형의 고리가 나타났다.

이게 바로 문고리야. 하지만 함부로 밀면 이렇게 되고 말지.”

심주은이 두 손바닥을 붙여 꼭 누르며 말했다. 납작하게 되어 버릴 것이라는 소리였다.

임청우가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그럼 함부로 잡아당기면 어떻게 되는데?”

그건...”

심주은이 우물쭈물하며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도 이 문고리의 작동원리를 자세히는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고 싶으면 직접 당겨보면 되잖아!”

대답이 궁해진 심주은은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난 여기에 볼 일이 없어.”

임청우는 고개를 살래 저었다.

심주은은 그의 능청에 화가 꼭지 끝까지 치밀었지만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단지 매섭게 도끼눈을 뜨고 한번 쏘아본 후에 천잠사의 한 쪽 끝을 고리에 묶었다.

(어디 내게 까불면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 싶어? 한 번 혼나 보라구.)

심주은은 고리에 천잠사를 묶고 멀찍이 물러서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기 있으면 다쳐. 이리와!”

이어 심주은이 손짓하며 부르자 임청우는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헌데 임청우가 막 그녀에게서 한팔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을 때였다.

!

심주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천잠사를 힘껏 잡아당겼다.

원형의 고리가 앞으로 재껴지는 순간 신녀문의 상징이라는 환상신녀의 모습이 그려진 암벽 전체가 마치 벼락 치는 듯한 기세로 앞쪽을 향해 넘어졌다.

!

굉음과 함께 일어난 강한 바람이 임청우를 덮었다.

암벽은 임청우의 뒷머리를 거의 손가락 한마디 정도의 간격을 두고 떨어졌다.

임청우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관통하는 듯한 느낌에 전신이 경직되었다.

화악!

폭풍같은 바람이 등을 떠밀어 임청우를 심주은의 품에 안기게 한 후, 더욱 강하게 떠밀어 두 사람을 함께 일장여 거리까지 날려버렸다.

너무나 창졸간의 일이고 예상치 못한 결과였는지라 심주은은 꼼짝 못하고 임청우를 안은 채 돌밭에 나뒹굴었다.

아야!”

임청우의 몸에 깔린 심주은이 비명을 질렀다. 돌멩이가 등을 찌를 뿐 만 아니라 임청우의 몸이 내리누르니 견딜 수가 없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높이 떴다가 떨어지는 충격 때문에 임청우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눌러버렸다.

!”

서로의 입술이 맞닿아 짓눌리자 심주은은 심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형언하지 못할 느낌이 전신으로 퍼져가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했다.

가슴이 심하게 쿵쾅거리고 목소리가 떨릴 것 같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숨소리가 거칠게 흘러나왔다.

임청우 역시 어떤 열기에 휩싸여 얼굴이 벌겋게 된 채 몸을 일으켰다.

내려다 보니 심주은은 눈을 꼭 감은 채 숨을 새근거리고 있었다.

임청우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며 입을 열었다.

일어나.”

심주은은 꿈을 꾸는 듯한 눈으로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아쉬운 표정을 짓고 일어났다.

두 사람 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문이 열렸다.”

임청우가 암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원래 환상신녀의 모습이 새겨져 있던 곳에는 월동문 모양을 한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검주 유소기 등도 환상신녀의 형상이 남아있는 암벽 근처에 신녀문의 성지가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그 암벽 바로 뒤에 입구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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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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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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