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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길한 예언

 

 

"삼낭이는... 우리 도룡곡 등씨일족의 유일한 후손이니... 잘 돌봐주기 바란다."

천면음마는 간절한 표정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누이동생께는 신세를 진 것도 있으니 최선을 다해서 보살펴드리겠습니다."

"고맙다. 장차 천하의 운명을 좌우할 거인(巨人)으로부터 삼낭이와 삼낭이의 딸들을 보살펴주겠다 약속을 들으니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구나."

(내가 천하의 운명을 좌우할 거인이 될 것이다?)

천면음마의 뜬금없는 칭찬에 고검추는 어이가 없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사람은 죽음을 목전에 두면 예지력(叡智力)이 생기기도 하는 법이니 괜한 소리라 여기지 말거라.”

고검추의 속내를 알아차린 천면음마가 고검추를 지긋이 올려다보며 말했다.

너는 아마도...”

말을 잇던 천면음마가 미간을 찡그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멀리 있는 무언가를 보는 표정이 되었다.

(또 앞날이 보인 것일까?)

고검추는 천면음마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말없이 기다렸다.

내 죄다. 내가 지은 죄의 값을 삼낭이와... 삼낭이의 딸들이 대신 치르겠구나.”

주르르르

천면음마의 눈꼬리로 다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삼낭 아주머니와 두 딸이 관련된 앞날을 본 모양인데... 대체 세 모녀가 무슨 일을 겪기에 저토록 비탄에 빠진 것일까?)

고검추는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천면음마가 앞날을 보게 되었다는 말을 온전히 믿지는 않고 있지만 마냥 무시할 수도 없다.

하물며 자신을 친 자식처럼 아끼고 보살펴 중 등삼낭과 관련된 일이니...

맹세... 맹세를 해다오.”

천면음마는 눈물로 물든 눈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며 간절하게 말했다.

제가 어떤 맹세를 해주길 원하십니까?”

고검추는 한숨을 쉬며 천면음마를 내려다보았다.

이어진 천면음마의 말이 고검추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삼낭이와 삼낭이의 딸들이... 무슨 일을 당했더라도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해다오.”

천면음마는 필사적인 표정이 되어 말했다.

만일 손이 몸에 붙어있었다면 고검추의 옷을 부여잡았을 것이다.

(삼낭 아주머니와 두 딸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긴다는 건가?)

고검추는 가슴이 섬칫해졌다.

양모 당혜선이 투신해버린 지금 등삼낭과 그녀의 딸들은 자신에게는 거의 유일한 지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들에게 무언가 변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검추는 가슴에 납덩이가 들어찬 기분이 되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삼낭 아주머니는 제게 어머니나 다름없는 분이십니다. 또 옥경이와 옥령이는 남매처럼 자란 사이니 피붙이인 듯 지켜주겠습니다.”

고검추가 초조해지는 마음을 애써 숨기며 천면음마에게 말했다.

하지만 천면음마는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천지신명을 걸고... 삼낭이 모녀를 네가 거둬서 보살펴주겠다고 맹세해다오.”

필사적인 표정이 된 천면음마는 고검추에게 윽박지르듯 말했다.

"천지신명께 맹세드리겠습니다. 삼낭 아주머니와 옥경이, 옥령이는 반드시 제가 거두어 보살펴주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고검추는 천지신명께 맹세를 해야만 했다.

세 모녀를 거둬주겠다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천면음마는 그제서야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고맙다. 한 가지 당부할 것은... 그 아이들에게 내 정체는 숨겨다오."

"그리하겠습니다."

천면음마의 당부에 고검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인공노할 색마인 천면음마가 자신들의 오라버니이고 외삼촌이라는 사실을 등삼낭 모녀들이 알아서 좋을 게 없다.

"내가 벗어놓은 겉옷을 뒤져보아라. 네게 줄 물건이 있다."

천면음마는 고개를 돌려 토지묘 바닥에 널려있는 자신의 겉옷을 돌아보았다.

그자는 자운 비구니를 농락하기 전에 비에 젖어 무거워진 겉옷을 벗어놨었다.

고검추는 천면음마가 시키는 대로 그의 겉옷을 끌어당겨 살펴보았다.

겉옷 안쪽에 달린 주머니에서 묵직한 가죽 주머니가 하나 나왔다.

방수 처리가 되어있는 그 가죽 주머니를 열어보니 잡다한 물건들과 함께 두 권의 비급이 들어 있었다.

 

-탐화비록(貪花秘錄)

-도룡무보(屠龍武譜)

 

두 권의 비급 중 도룡무보는 도룡곡의 비전 비급이다.

도룡무보 안에는 하마터면 고검추를 죽일 뻔한 도룡삼첩장 등 도룡곡 등씨일족의 패도적인 무공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 중 가장 뛰어난 것은 모두 구식으로 이루어진 도룡도법(屠龍刀法)이었다.

도룡구식(屠龍九式)이라고도 불리는 그 도법은 변화가 무쌍하면서도 신랄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하지만 지난 백여 년에 도룡구식을 완전히 연마해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룡구식을 완벽히 시전할 수 있다면 그는 도제(刀帝)라 불리어 손색이 없을 것이다.

탐화비록은 천면음마 등천하가 십여 년 전에 얻은 비급이다.

탐화비록을 남긴 인물은 무림 역사상 최강의 마인들로 인정받는 구마(九魔) 중 한 명이었다.

 

-화마(花魔)

 

아름다운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숱한 여자들을 농락한 전설적인 색마다.

그 때문에 화마라는 본래의 이름보다는 탐화색마(貪花色魔)라는 혐오스러운 별호로 더 자주 불린다.

화마는 평생 삼만 명 이상의 여자를 농락했다고 알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마가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 천수를 다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탁월한 재주덕분이었다.

먼저 화마는 절묘한 역용술을 지녔다.

그자의 역용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한 걸음 옮길 때 세 번 얼굴을 바꿀 수 있었다고 한다.

수시로 얼굴을 바꾸는 화마를 무슨 재주로 잡아서 죄를 묻는단 말인가?

변화막측한 역용술 외에도 화마는 경신술로도 이름을 떨쳤었다.

경신술로만 따진다면 화마는 고금을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할 정도다.

 

삼십여 년 전, 도룡곡은 호천무맹을 주축으로 한 중원 무림에 공격당해 멸망했다.

다만 도룡곡의 소곡주 등천하는 그 혈겁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었다.

등천하는 피눈물로 복수를 맹세했으며 다행히 도룡곡 비전의 도룡무보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복수는 쉽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등천하의 자질이 평범했다는 점이었다.

도룡무보에 수록된 절기들을 절정까지 연마하면 능히 독보천하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질이 뛰어나지 못한 등천하는 이십여 년을 고련했음에도 도룡무보 상의 절기를 채 삼할도 연성하지 못했다.

그 정도 성취로 중원 무림 전체를 상대로 복수를 시도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실의에 빠진 등천하는 무공 수련을 포기한 채 세상을 방랑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십여 년 전 그는 운중산(雲中山)의 어느 계곡에서 화마의 시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화마의 시신에서 탐화비록을 얻은 등천하는 뛸 듯이 기뻐했다.

비로소 무공이 약하더라도 복수할 수 있는 수단을 발견한 때문이었다.

물론 그 수단이란 것이 원수들의 아내와 딸, 여제자들을 겁탈하는 것이었다.

몇 년을 고련한 등천하는 마침내 화마의 수법을 대충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등천하는 자신도 모르게 화마의 음탕한 성격을 이어받게 되었다.

여자를 그저 욕정을 해소하는 대상으로만 보게 된 것이다.

결국 등천하는 강호의 아녀자들을 짓밟는 제이의 화마, 천면음마가 된 것이다.

 

"탕음마고를 제거하는 방법은 탐화비록에 수록되어... 있다."

말을 잇는 천면음마 등천하의 얼굴은 극심한 고통으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 이제 네가 약속을 지킬 차례다. 견디기... 힘들구나."

그는 간절한 눈빛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

고검추는 가슴이 떨렸다.

지금까지 병아리 한 마리 죽여본 적이 없는 그였다.

비록 상대가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때문이지만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하지만 고통스러워하는 천면음마의 얼굴을 보니 마냥 망설이고 있을 수만도 없다.

(일각이라도 빨리 손을 쓰는 것이 이 분을 위하는 길이다.)

고검추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천면음마의 심장 부위에 자신을 손바닥을 붙였다.

"... 고맙다."

천면음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지잉!

고검추는 얼굴을 돌리며 태을강기의 경기를 천면음마의 심장에 밀어 넣었다.

퍼득!

사지가 잘려나간 천면음마의 몸둥이가 한 차례 세차게 경련하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태을강기의 강력한 잠경이 천면음마의 심장을 파열시킨 것이다.

(... 내가 사람을 죽이다니...)

고검추는 망연한 표정으로 천면음마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오공으로 선혈을 흘리며 죽어 있는 천면음마의 얼굴은 오히려 평온해 보였다.

천면음마라는 이름으로 전 무림에 악명을 떨쳤던 가엾은 인물의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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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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