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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마의 신세한탄

 

 

"크크크... ... 동정해줄 필요는 없다.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은... 내 자신이 잘 알고 있으니..."

고검추의 어두운 표정을 본 천면음마는 체념한 듯 웃었다.

"흐흐흐... 하지만 철봉황... 그 계집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본좌가... 피에 섞어서 뿜어낸 탕음마고(蕩淫魔蠱)에 중독되었으니..."

이어 천면음마는 악에 바쳐 내뱉었다.

사실 그자가 준비한 진정한 암수는 철봉황에게 접근하여 탕음마고라는 지독한 최음제를 뿜어내는 것이었다.

천면음마는 이빨을 하나 빼서 생긴 빈틈에 최음제가 들어있는 은제 구슬을 끼워두고 있었다.

상대 못할 강적을 맞닥트릴 경우 최음제가 들어있는 그 은제 구슬을 깨트린 후 침에 섞어 분사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오늘 철봉황의 복마사자후에 가슴을 맞는 순간 입속에 숨기고 있던 최음제 탕음마고를 피에 섞어 뿜어내게 되었다.

그걸 알 리 없는 철봉황은 천면음마를 베기 위해 쇄도하다가 탕음마고가 섞인 천면음마의 피를 일부 흡입한 것이다.

"... 철봉황! 그 여인이 철봉황이었습니까?"

천면음마의 말을 들은 고검추의 안색이 일변했다.

비록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으나 고검추는 철봉황이 자운 비구니를 구해 토지묘를 떠나는 과정을 목격했었다.

"크크크... 그렇다. 그 계집이 호천무맹 최강의 무력집단인 철혈호천위(鐵血護天衛)의 총사(總士) 철봉황 고현경이다."

"!"

고검추는 안타까운 탄식을 토했다. 머나먼 기련산으로부터 찾아온 여인을 바로 눈앞에서 놓친 것이다.

천면음마는 음산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흐흐흐... 네놈이 그 계집과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나... 잊어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그 계집은 곧 탕음마고의 발작으로 희대의 탕녀가 될 테니..."

"... 무어라고요?"

고검추는 눈을 부릅떴다.

"클클클... 정파백도의 태두인 호천무맹의 신임 총사가 천하에 다시없을 음탕한 계집으로 변할 테니 볼만하지 않겠느냐?"

천면음마는 악의에 찬 웃음을 흘렸다.

 

-탕음마고!

 

남만 특산의 고독으로 인간의 몸속에 침투하여 생명의 근원인 원영지기(元嬰之氣)를 먹고 산다.

원영지기를 갈취당한 숙주는 격렬한 욕정을 일으켜 이성(異性)을 찾게 된다.

이성과 관계하여 상대의 정기를 흡수해야만 빼앗긴 원영지기를 보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검추는 분노의 표정으로 천면음마를 노려보았다.

"... 악독한 사람이군요 당신은..."

그는 철봉황 고현경이 아버지의 동문 사매라는 사실 외에는 아는 게 없다.

다만 양모 당혜선이 그녀를 찾아가 의탁하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자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었다.

한데 그런 철봉황 고현경이 천면음마가 투사한 탕음마고에 중독 당했다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천면음마에게 살의가 일어나는 고검추였다.

"흐흐흐... 그 계집을 탕음마고에서 구하고 싶으냐?"

천면음마는 그런 고검추의 표정을 살펴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고검추는 살기 어린 눈으로 천면음마를 노려보았다.

"크크크... 눈치가 빠르니 얘기하기도 쉽군."

고검추의 단도직입적인 말을 들은 천면음마는 히죽 웃었다.

"본좌를 위해서 두 가지 일을 해다오. 그러면... 철봉황을 구할 방도를 가르쳐주마."

"말해 보시오."

고검추는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했다.

천면음마는 고검추의 말을 듣자마자 즉시 대꾸했다.

"첫번째 조건은... 본좌를 죽여 달라는 것이다."

고검추는 천면음마의 말에 흠칫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철봉황 고현경은 천면음마의 전신 경맥을 난자해 놓았다.

하지만 치명적인 급소는 피하고 난자하여 쉽사리 죽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결국 천면음마는 모든 피가 빠져나갈 때까지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게 될 것이다.

천면음마는 그 끔찍한 고통을 끝내달라는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은... 나의 누이를 돌봐달라는 것이다."

천면음마는 고통으로 이지러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피붙이가 있었습니까?"

고검추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가엾기도 하고... 나같은 말종에게는 너무 과분한 착한 누이동생이지.”

천면음마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숱한 여자들의 인생을 망쳐놓은 주제에 제 누이만큼은 끔찍하게 생각하는구나.)

고검추는 천면음마의 이중적인 태도에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동문 사매인 철봉황을 구하려면 천면음마와 거래를 해야만 한다.

영누이 이름이 무엇이고 어디에 사는지 말씀해보시오. 최선을 다해 보살펴 드릴 테니...”

고검추는 끓어오르는 혐오감을 억누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고맙다."

천면음마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자는 내심 고검추가 자신의 제안을 거부할까 마음을 졸이고 있었던 것이다.

헌데 이어진 그자의 말이 고검추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내 누이의 이름은 등삼낭(鄧三娘)이고 올해 서른다섯 살이다.”

... 등삼낭!”

고검추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같이 외쳤다.

“...!”

말을 이어가려던 천면음마는 움찔하며 입을 다물고 그런 고검추를 올려다보았다.

(이름은 물론이고 나이까지 같다! 그렇다면...)

고검추는 팽가촌 촌장의 며느리인 등삼낭을 떠올리며 전율했다.

네놈... 내 누이를 알고 있는 것이냐?”

천면음마가 고검추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혹시... 누이동생 분의 왼쪽 입 꼬리 쪽에 점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고검추는 등삼낭의 얼굴에 나있는 점을 떠올리며 물었다.

틀림없구나. 네놈은 내 누이와 아는 사이였어.”

천면음마 역시 충격을 받은 표정이 되었다.

(맙소사! 등삼낭 아주머니가 이 악명 높은 색마의 누이동생이었다니...)

고검추는 당혹과 함께 자신이 운명의 사슬같은 것에 엮여있다는 것을 느꼈다.

설마 이 넓은 세상에서 우연히 만난 인물이 지인의 오빠일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와 함께 고검추는 팽가촌의 촌장 팽유가 신세를 진 적이 있다는 명문가가 청해의 도룡곡이었음을 깨달았다.

팽유가 등삼낭의 친가가 도룡곡이라는 사실을 숨긴 것은 도룡곡이 전 무림에 공적으로 찍혔던 가문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팽가촌... 너는 기련산 팽가촌에서 산 적이 있겠구나.”

천면음마도 사정을 짐작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렇습니다. 나는 고검추라 하며 얼마 전까지 팽가촌에서 살았습니다.”

고검추는 복잡한 심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전에 널 본 적이 있었겠지만... 마지막으로 팽가촌에 들른 게 삼 년 전이었으니 설령 널 보았다 해도 지금의 모습에서 떠올릴 수는 없었겠지.”

말 하는 천면음마의 얼굴에도 만감이 교차했다.

삼십여 년 전... 도룡곡이 중원 무림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을 때... 나는 나 혼자만 살아남은 줄 알았다. 나중에... 기적적으로 목숨을 부지한 종을 만나서 막내 누이가 살아있으며... 아버지에게 신세를 진 적이 있는 기련산 팽가촌의 촌장이 구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천면음마는 회한이 서린 눈으로 토지묘의 천장을 올려다보며 독백하듯이 말했다.

고검추는 방해하지 않기 위해 묵묵히 천면음마의 말을 듣기만 했다.

기연을 만나 복수할 능력을 갖춘 나는... 우리 도룡곡의 멸망에 관여한 문파나 가문을 찾아다니며 계집들을 닥치는 대로 유린했다. 그게 가장 효과적인 복수라 생각해서 한 짓이었는데...”

천면음마의 눈 꼬리로 물기가 어렸다.

뒤늦게 삼낭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팽가촌을 찾아갔지만... 차마 부끄러워 삼낭이 앞에 나설 수가 없었다.”

주르르!

마침내 천면음마의 눈꼬리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삼낭 아주머니가 누이동생인 걸 알고도 나서지 못한 건 그 전에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이었구나.)

그 모습을 보며 고검추는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천면음마는 여자라면 가리지 않고 강간해왔다.

노소와 미추를 가리지 않았으며 비구니와 여자 도사들까지도 거리낌없이 강간했었다.

그런 처지에 차마 누이동생과 누이동생의 딸들을 볼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천면음마는 먼발치에서 누이동생과 누이동생이 낳은 딸들을 몇 번 훔쳐본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다행히 누이동생이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어서 그를 안심시켰었다.

(이 천인공노할 색마에게도 혈육을 아끼는 마음이 남아있기는 했구나.)

고검추는 입맛이 쓰게 느껴졌다.

혈육은 끔찍하게 여기면서 다른 집안의 여자들은 거리낌없이 강간해온 천면음마의 행태는 용서할 수도 없고 이해해주기도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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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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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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